구약성서 이해하기
단순독서를 넘어, 토라에서 시작하여 토라로 끝나는
히브리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
I.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할까?
단순독서에서 비평적·정경적 읽기로
A. 경건한 읽기 — 통독, 암기, 본문과의 대화
성서 읽기의 기본은 통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건너뛰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읽는 것이 성서를 대하는 기본 태도다. 글자 하나하나를 살펴 읽으며 암기하고, 본문에 스스로 묻고 답을 얻는 과정이야말로 경건생활의 가장 소중한 기초공사다.
좁게는 성서의 지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독서요, 넓게는 본문에 질문하고 답을 얻는 대화행위다. 단순독서는 성서의 세계관과 큰 흐름을 깨닫는 데는 매우 좋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성서의 말씀을 바로, 옳게 알았다고 볼 수 없다.
다윗이 이새의 몇 번째 아들인가? 성경은 서로 다른 두 답을 준다 — 삼상 16:10–11과 대상 2:13–15. 이뿐 아니라 성서는 곳곳에서 단순히 읽어서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차이와 모순을 보여준다. 이것이 신학·문학·역사·문화의 도구로 성서를 비평적으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B. 교리의 증빙수단으로서의 독서
전통적 성서 읽기 가운데는 교리나 요리문답의 증빙자료로 성경의 절들을 끌어다 늘어놓는 노력이 있다. 좋게 보면 자기가 무엇을, 왜 믿는지를 ‘성서적’으로 분명히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교리와 신앙고백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늘 재해석되어 온 ‘해석의 과정’이다.
같은 성서에서 출발했어도 신앙고백과 교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아우크스부르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연합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등.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성서가 재해석되지 않으면 교회는 몰락하고 만다. 불변하는 교리는 없다.
구원론·신론·종말론에서 성서는 결코 하나의 답만을 말하지 않는다. 예정설(엡 1:5,11; 행 4:27–28)과 만인구원설(요 3:16)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지만, 아무런 해명 없이 성경 안에 그냥 나열되어 있다.
교리는 늘, 끊임없이 성경으로 점검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세 암흑기처럼 교리가 도리어 성서를 해석하고 점검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C. 성서해석과 비평적 읽기
성경공부가 믿음을 전제로 교리와 전통에 순응하는 학습이라면, 성서연구는 이성의 수단을 동원해 구약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신앙을 객관적·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성서연구는 성서해석을 위해 존재한다.
성서해석이란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노력’, 곧 주석(exegesis)이다. 그 반대는 자기 생각을 ‘집어넣으려는 노력’(eisegesis)이다. 해석하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자기 생각대로 성서를 읽어내는 실수를 저지른다.
비평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인’의 뜻은 ① 나누다·구별하다·뽑아내다, ② 고려하다·생각하다·판단하다, ③ 결정에 이르다·결단하다·심판하다이다. 따라서 성서를 ‘크리네인’한다는 것은 성서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관찰하여 그 말씀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왜 성서를 비평해야 하는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은 분명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장소·사회·역사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수와 층이 다양하고,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는 천 년 이상의 시간 틈이 있다.
성서 본문에는 두 차원이 있다 — 역사성과 초월성. 역사성은 특정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차원이고, 초월성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의 차원이다. 비평적 읽기는 본문의 역사성을 아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D. 성서해석과 ‘정경적 읽기’
정경이란 ‘자(=척도)‘라는 뜻이다. 성서를 정경으로 대한다는 것은 성서를 신앙공동체의 삶과 신앙의 표준 지침서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성서가 사람의 글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속에는 사람의 속성이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성서는 반드시 비평해야 한다. 그럼에도 정경으로 대한다는 것은 신앙과 삶의 척도로 성서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정경은 그것을 자기 삶의 정체성과 방향을 가늠하는 규범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권위 있는 자’의 구실을 한다. 성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고 무신론자에게도 교훈을 줄 수 있지만, 옛 성현의 가르침을 발견하는 것과 ‘나의 신앙과 삶의 기준’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을 위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서를 들으며 대각성이 일어난 것은 지식을 발견해서도, 교리를 설정했기 때문도 아니다. 자기의 정체성과 삶의 태도를 깨닫고 그 깨달음에 자기의 삶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텍스트(성서)의 모습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와 해석은 신앙공동체의 시대와 정황에 따라 늘 새로워진다. 정경을 형성하는 것은 신앙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정경은 신앙공동체의 믿음과 삶을 규정한다. 성서의 정경적 읽기 — 그것은 모든 성서 읽기와 해석의 궁극적 과제다.
오경의 구조 한눈에 보기
구원의 시작
구원의 목적
비전(청사진)
준비와 실패
비전(청사진)
II. 구약성서와 “타나크”
히브리 성서의 세 글덩어리
A. “타나크”(Tanak)란?
기독교인이 ‘구약성서’라 부르는 39권은 신약과의 관계에서 생긴 말이다. ‘새 약속’에 짝을 이루는 ‘옛 약속’을 담은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본디 유대인들의 정경이다. 우리가 유대교의 정경을 우리 책의 일부로 받아들였다고 말해야 옳다. 같은 성경을 유대인들은 “타나크”라고 부른다.
유대인의 정경 형성 과정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쳤고, 각 단계마다 하나의 커다란 묶음책이 만들어져 결국 세 개의 큰 묶음이 생겼다. 그 첫 발음을 따서 만든 합성어가 ‘타나크’다. 곧 토라·네비임·케투빔의 첫 글자다.
① 가장 먼저 묶인 토라(오경) → ② 네비임(예언서) → ③ 케투빔(성문서). 토라·예언서는 포로기(주전 587–538)부터 시작된 대각성의 열매이고, 케투빔은 주후 1세기에야 책이 되었다. 세 묶음이 최종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얌니아 회의(주후 90년경)에서다.
B. “타나크”와 신약성서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에 신약을 더하여 정경이라 고백했다. 이 사실은 중요한 숙제를 남긴다 —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 통일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구약에만 몰입한다면 유대인들의 해석과 다를 것이 없다. 기독교인의 것이 유대인의 것과 다른 까닭은 신약성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을 볼 때 신약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흔히 신약을 더 강조하여 구약을 종속시키고, ‘구약은 율법·무서운 하나님, 신약은 은혜·구원’이라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구약도 신약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둘의 관계도 그르친다.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 고백은 신약 저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을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이고 어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닫게 하는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예수를 이스라엘 역사의 성취로 보지 않는 한, 곧 구약과의 관계 속에서 그 절정으로 보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되었기에, 신약의 설교자는 반드시 구약과 함께 옛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그 삶이 어떠해야 했는지를 선포해야 한다.
C. “타나크” —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구조
1. 토라 —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다섯 권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큰 책이 다섯 부분으로 된 것에 가깝다. ‘모세’의 권위 아래 수집되어 흔히 ‘모세오경’이라 한다. 토라는 두 가지 성격의 글로 되어 있다.
① 이야기체 — 창조에서 아담·아브라함·야곱·모세로 이어지는 민족 형성사.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② 법령체(출 19:1–민 10:10, 신 1–34장) — 시내산에서 받은 계약·계명·율례.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힌다.
레위기·신명기 같은 법령체를 그냥 넘기고 이야기체만 읽어서는 안 된다. 토라를 모두 읽고 소화할 때 비로소 오경은 오늘도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려주는 거룩한 말씀이 된다.
2. 네비임(예언서)
히브리 성서는 역사서와 예언서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예언서라 부른다. 우리가 역사서라 하는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는 전기예언서,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과 12소예언자는 후기예언서다.
예언서에는 역사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예언자들은 토라의 ‘이야기’와 ‘법’을 자기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적용한 설교자들에 가깝다. 따라서 예언서를 앞날을 미리 알리는 점쟁이의 책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 근본 특징은 토라와 마찬가지로 「위(하나님)로부터 아래(사람에게)로」 내려온 글이라는 점이다.
3. 케투빔(성문서, ‘기록된 글들’)
시편·욥기·잠언·다섯 두루마리(룻기·아가서·전도서·애가·에스더)·다니엘·에스라·느헤미야·역대기. 시·노래·격언·이야기·묵시 등 형식이 매우 다양하다. 정경화 과정에서 논란이 된 책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음란물로 규정될 법한 아가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비유로 해석), 부정적인 전도서(→ 저자를 솔로몬으로 표제), 유대 국수주의적 에스더(→ 식민지 유대인의 성공담). 이런 이유로 정경이 되었다.
성문서는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시와 노래, 곧 토라와 예언서에서 만나는 하나님께 털어놓는 고백·찬양·기도·탄식이다. 크게 보아 ‘경건문학’이다. 토라·예언서와 달리 사람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성격의 책이다.
D. 정리
예언서는 토라의 재해석이다. 성문서는 토라와 예언서에 대한 해석의 연장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어 구약성서는 유대인 학자들의 말처럼 “토라에서 시작하여 토라로 끝난다.”
III. 해방에서 성화까지
오경의 구조에서 읽는 이스라엘의 신앙
A. 히브리인들의 이민 — 출애굽기·신명기의 구조
오경은 크게 「창세기」와 「출애굽기–신명기」 둘로 나눌 수 있다. 「출애굽기–신명기」는 모세의 일대기 형식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모세의 탄생—출 1장 / 모세의 죽음—신 34장). 창세기는 모세 이전 시대, 곧 모세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서론이다.
야곱의 후손으로서의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 신앙공동체로 변화되는 과정이 오경의 두 구조 안에서 강하게 제시된다. 학자들은 「출–신」 본문이 ‘시내산’과 ‘모압’ 두 지점을 축으로 한 ‘이주여행(migration)’ 양식을 띤다는 것을 밝혔다.
‘가’와 ‘나’ 모두 여행(1)은 목적지(2)를 향한다. 그러나 둘은 분명히 다르다. ‘가’에서 해방 이야기는 시내산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고, 시내산 사건은 해방 사건의 완성이다. ‘나’에서 모압평원의 모세 설교(신명기)는 여행에서 겪은 실패와 좌절을 교정하기 위한, 시내산 법전의 재해석이다.
시내산·모압에 ‘머물러 있는 기간’이 ‘이주/여행의 기간’보다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삶의 양식은 ‘쉬지 않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것에 가깝다. 해방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정착을 위한 예비이며 과도기다.
B. 다시 읽는 출애굽기
창세기가 한 가족·한 조상(father)의 이야기라면, 「출애굽기–신명기」는 한 백성·한 설립자(founder)의 이야기다. 출애굽기는 세 개의 ‘정체(identity)‘를 소개한다 — 하나님(여호와)은 누구신가? 모세는 누구인가? 한 민족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거기에는 두 개의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집트 탈출 → 시내산)이고, 또 하나는 주목할 만한 하나님의 움직임이다. 하나님은 출애굽하던 사람들에게 가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출 3:7–8).
출애굽기 1–18장에서 모세는 “해방 사건의 심부름꾼(the liberator)“이다. 그러나 시내산에 이르러(출 19:1 이하) 그는 산을 오르내리며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the mediator)”, 곧 말씀·법·토라의 전달자가 된다.
드디어 시내산 자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더불어 사는” 계약을 맺는다. 구속의 목적은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지”에 있다. 그래서 머무는 그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 중에 거할 성소(회막)“를 산 아래, 백성이 머무는 한복판에 세우라 명하신다(출 25:1,8,22). 산 위의 하나님이 산 아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하산하셨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려오심’을 신약의 예수님에게서 본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대개 심판을 위해서였다(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그러나 지금의 내려오심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은 공동체 속에 거하시기 위해서다. 회막의 건설(출 40장)은 우리를 레위기 1:1로 초대한다. 이제 하나님은 회막에서 말씀하신다.
C. 되새겨 들어야 할 시내산 전승단락 (출 19:1–민 10:10)
시내산 단락이 소중한 까닭은, 바로 이것 때문에 모세가 해방자로만이 아니라 토라의 전수자·법의 전수자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사무엘·다윗과 달리 모세의 특별함은 토라가 오직 모세 한 사람에게서만 비롯되었다는 데 있다.
출 19:2에서 백성은 시내산 앞에 “장막을 쳤고”, 민 10:11–12에서 “장막을 걷고 떠났다”. 그 사이가 시내산 단락이다. 산에 오르는 표현(19:3)은 수평 이동이 수직 이동으로 바뀐 것을 뜻한다. 모세는 출애굽기 전체에 걸쳐 모두 일곱 번 산을 오르내린다.
레 1:1 전까지의 말씀은 산에서 들려졌고(출 19:3–40:38), 레 1:1–민 10:10은 회막에서 들려온다. 산에서 듣는 말씀은 회막에서 듣는 말씀을 위한 예비 단계다.
회막의 말씀은 다시 둘로 나뉜다 — 여호와가 다스리는 공동체의 구성(레 1:1–27:34)과 가나안을 향한 여행의 준비(민 1:1–10:10).
D. 해방에서 성화까지
소위 ‘성결법전’이라 불리는 레위기 17–27장은 성결을 명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성결은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는 성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명령이다.
레위기 19장이 나아가는 곳은 ‘이웃 사랑’이다. 개인 윤리가 아니라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완성되는 거룩함이다(레 19:18,37). 신약에서도 성결은 사랑의 실천으로 압축된다 — 예수께서 가르친 제자의 삶은 사랑의 삶이다.
출애굽기 1–18장(시내산까지) → 19–40장(회막 건설) → 레위기 1–27장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출애굽 사건이 회막 공동체 건설을 위한 출발이었음을 보여준다. 회막 신앙은 두 가지를 비판한다.
① 하나님이 산에 계시기에 그 현현을 신비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식의 신앙을 거부한다.
② 성전 속에 갇혀 계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종교를 거부한다(왕권 수호를 위한 성전 종교 지상주의 비판). 제사는 이제부터 하나님이 인간 속에 찾아오시는 장소인 회막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해방은 해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해방 공동체가 이스라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회막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한 해방은 미완성이다. 레위기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간 사회의 건설에 관한 밑그림이 담겨 있다.
IV.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이스라엘
전기예언서 — 신정사회와 군주사회의 대비
A. 전기예언서에 대하여
히브리 성서의 두 번째 묶음은 「예언서」다. 전기예언서는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상하·열왕기상하이고, 후기예언서는 이사야부터 12소선지까지다. 후기 예언자들은 삶과 말씀이 문서로 남아 ‘문서 예언자’라 불린다.
우리가 역사서라 하는 「여호수아–열왕기」를 순전한 ‘역사 기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책들은 사실로서의 역사를 증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한다. 이를 신명기적 역사 기록이라 한다.
오경의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사회’였다. 그러나 사무엘서–열왕기서는 그 꿈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준다. 왕정은 본디 이스라엘이 걸어갈 길이 아니었다. 인간이 왕이 되어 다스린 시절을 비판하는 것 — 그것이 바로 예언서다.
신정사회와 군주사회의 대비! 평등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대립! 이것이 토라를 잇는 책들을 예언서로 모은 히브리 정경의 의미다.
B.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 왕을 세우지 않았던 이스라엘
학자들은 가나안 정복에 대해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① 군사 정복설 —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12지파가 단번에 정복(수 1–12장).
② 평화적 침투설 — 오랜 세월에 걸친 ‘침투’와 평화적 이주(사사기 1장).
③ 사회혁명설 — 히브리인과 가나안 농노들이 연합해 봉건영주를 몰아낸 건국.
더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모두 그들에게 왕이 없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정착 초기 이스라엘은 억압이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 이스라엘’이었다. 이 시기의 지도자가 ‘사사들(쇼페팀)’ 또는 ‘나기드’다. 위기가 지나면 본디 자리로 돌아가는 순전한 임시직이었다.
사사기에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을 때”라는 구절이 네 번 나온다(17:6, 18:1, 19:1, 21:25). 왕이 없어 외적에 무방비였지만, 그럼에도 초기 이스라엘은 왕을 거부했다 —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정복한 것은 백성이 아니라 ‘성주’, 곧 왕과 그 군사였다. 마지막 24장에서 온 백성이 한 가지 서약을 한다 —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시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자는 것(수 24:1,15,16–18).
C.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 잘못된 출발
사무엘과 열왕기서는 왕국을 세운 이스라엘의 삶을 담담히 적는다. 왕정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삼상 9:1–10:16)과 부정적인 부분(삼상 8:1–22 등)이 함께 있지만, 전체 분위기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을 때 쓴 ‘왕’을 지칭하는 히브리어는 ‘나기드’ — 곧 ‘사사’로 번역되던 말이다. 왕을 세우는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왕이 아닌 사사’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잘못 태어난 존재들이다. 다윗·솔로몬 예외 없이 모두 비극의 출발자요, 뒤이은 왕들은 비극의 열매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렸다”(삼상 8:7–9). 여기에 전기예언서가 신명기적 역사서로서 내뿜는 왕·왕국·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있다.
전기예언서는 왕궁이 패망한 뒤 폐허의 쓰라림에서 왕국사를 반성한 글이다. 나라의 잘됨과 잘못됨이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언약을 준수하는 데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D. 아, “환(還)애굽”의 이스라엘이여!
열왕기서는 솔로몬의 통일왕국, 남북 분단왕국, 북왕국 멸망과 유다의 패망을 적는다. 그런데 정신사의 눈으로 보면, 이 책이 적는 때가 출애굽 이전의 삶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왕이 백성을 먹여 살리던 시기, 강제 노역꾼이 있던 시기, 하나님을 모셔두는 붙박이 집(성전)이 있던 시기 — 이것은 도대체 언제였는가? 바로 애굽에서 살던 때였다. 성전 건립은 도리어 하나님을 그곳에만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했다(회막과 반대).
몸은 가나안에 살지만 정신과 삶의 양식은 이집트에서 살던 때와 다를 바 없던 시대 — ‘출애굽’이 있다면 이 시기엔 ‘환애굽’이란 말이 타당하다.
E. 무너져 내리는 전통 — “약자”의 출현
왕국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의 포기였고, 여호와 신앙을 바알 신앙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신앙 전통이 무너지면서 필연적으로 ‘가진 자와 없는 자’로 갈라지는 현상이 생겼다. 과부·고아·가난한 사람을 구약은 ‘약자’라 부른다.
지파 사회·유목민 생활에서는 개인보다 무리가 중요했다. 양은 개인 것이어도 초지는 공동체의 것, 농토의 마지막 소유권은 가족이 아닌 씨족에게 있었다. 가난해진 자는 씨족의 공동 책임으로 돌보았다 — 근본적으로 평등사회였다.
가나안 정착 후 사람들은 가옥을 짓고 땅을 차지해 자기 소유를 가졌다. 이스라엘에게 모든 땅은 하나님 것이어서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었는데, 왕국사회는 이 연대성을 깨고 부족 윤리와 하나님 신앙을 담보로 내준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는 ‘비참한 사람들’이 태어났다.
구약에는 기존 질서를 하나님 이름으로 옹호하는 전승(다윗 전승)과, 억눌린 자의 해방을 위해 저항하는 비전(모세 전승)이 있다. 예언자들은 바로 모세 전승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아 왕정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꾼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난한 자·억눌린 자에게는 은혜의 날이지만, 그들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다. 나사렛 예수의 기쁜 소식이 예언자적으로 읽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V. 예언(預言)과 예언자(預言者)
‘오늘, 여기에서’ 외치는 말씀의 심부름꾼
A. 예언(豫言)과 예언(預言)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예언은 ‘앞날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성서의 예언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본디 ‘장래 일을 미리 말한다’가 아니라 ‘내게 맡겨주신 말씀을 전한다’는 뜻이다.
‘미리’라는 예(豫)가 아니라 ‘맡긴다’는 예(預)를 써야 한다. 그러면 예언은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예언자는 “말씀을 맡은 자”가 된다.
영어 ‘prophet’의 ‘pro-‘도 두 뜻을 가진다 — ‘미리’(시간)와 ‘대신에’(맡긴이·장소). 전통적 이해는 시간이었지만, 성경을 따르면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 ‘백성 앞에서 말하는 자’가 된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언이란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다.
B. 예언과 예언자
1. 원어로 살피는 뜻
예언자를 뜻하는 히브리말 ‘나비(nabi)‘는 아카디아말 ‘나부’에서 왔다. 능동으로 보면 ‘부르는 자·선포하는 자’, 수동으로 보면 ‘부름을 받은 자’다. 두 해석이 고루 섞이면 예언자의 참모습이 그려진다 — 예언이란 차라리 ‘설교’이고, 예언자는 ‘말씀의 심부름꾼’이다.
다음으로 ‘호제, 로에’는 ‘선견자’로 번역된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점술적 미래가 아니라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이었다.
2. 예언의 성격 — ‘오늘, 여기에서’
예언자의 관심사는 미래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오늘, 현재’에 집중한다. 예언의 까닭은 오직 현재를 결정짓기 위함이다 — “지금의 더러워진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현재를 선택하라!” 구약의 모든 예언은 현재로 향해 있다.
3. 심부름꾼의 말투 (Messenger’s Formula)
예언서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사자문체·전령자 공식’이다(아모스 1:3–5 참고). 예언자는 말머리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머리말 공식,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 하고, 마지막을 ‘이는 주님의 말씀이시다’(끝말 공식, 네움 아도나이)로 끝맺는다.
이 포장은 지금 하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임을 드러내는 장치다. 예언자는 야훼의 심부름꾼·대사였고, 바로 거기에 그 권위가 있다.
예언자는 단순한 대변인이 아니다. 외쳐도 돌아오는 이익이 아무것도 없는데, 말하고 외치기를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 삼은 사람! 역사의 질곡을 매고 가장 현재의 역사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C. 예언자와 그 시대
1·2. 예언자들과 시대 구분
초기(전기) 예언자는 사무엘·나단·미가야·엘리야·엘리사 등이고, 후기(문서) 예언자는 3대 예언자(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와 12소예언자다. 후기 예언자는 주전 750년 이래 등장한 ‘문서 예언자들’이다.
북왕국 쇠퇴·멸망기
심판 예언자들의 회개 외침
남왕국 유다 몰락기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예레미야·에스겔(1–32장)
포로기(식민지 살이)
구원 선포 — 에스겔(33–48장), 제2이사야
포로기 이후
심판과 구원을 엇갈려 선포
식민지 이전 — 왕궁의 멸망과 사로잡힘을 심판으로 선언하는 ‘심판 예언자’. 포로기 — 나라가 망하자 외침이 바뀐다. 성전·민족·땅의 회복을 다짐하는 ‘희망의 신학’. 포로 후기 — 혼란 속에서 경고와 위로, 심판과 구원을 함께 말할 수밖에 없었다.
3.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참·거짓을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단순한 기준들(성전 예언자는 거짓, 거리에서 외치면 참)이 있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신명기(신 18:17–22)는 예언의 말이 이루어졌는가로 판가름할 수 있다 했지만, 이 방법도 다 옳지는 않았다.
참·거짓 예언자 모두 하나님을 구속·계약의 신으로 고백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해석학의 차이다.
4. 제도권 신학자 vs 정경적 신학자
제도권(거짓 예언자) —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 이스라엘을 위해 하실 수 있는 힘을 믿으라. 하나님 역사하심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계약의 이득을 따진다.
정경적(참 예언자) — 이스라엘의 의무를 강조. 하나님께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정체성을 묻는다.
참 예언자들도 출애굽의 해방과 시내산 계약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란 “이집트에서 끄집어내신 하나님은 팔레스틴 땅에서도 끄집어내실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 — 이것이 참 예언자의 심판 메시지다.
무조건 이스라엘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다. 심판이란 새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위한 창조의 고통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부활의 영광으로 변화되는 체험인 것이다.
그러나 포로 후기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로니아를 함락시키며 새 시대가 열린다. 유대인의 ‘고향 찾기’ 염원과 맞물려 ‘시오니즘’의 열풍이 일고 관심이 성전 재건에 쏠린다(학 1:5–10). 하지만 제2성전 봉헌 이후(주전 6세기 말) 그런 예언이 더는 설득력을 잃자, 예언 운동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실패로 끝난 것 같은 예언”의 자리에, 예언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념이 자리 잡는다. 여기에서 묵시문학 운동이 시작된다. 이제 “시간이 찬 뒤” 그 묵시문학 토양 위에서 장차 올 다윗 왕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땅에 강림하시는 것이다.
D. 예언자와 전승
예언자들은 옛 이스라엘의 신앙을 계승·수호하며 자기 시대에 새롭게 해석한 신학자들이다. 전승이란 본문 배후에 새겨진 정신·신학·역사적 경험·주제를 총괄하는 명칭, 곧 물려받고 계승한 신앙 이야기다. 예언자의 역사 해석은 그가 물려받은 전승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세가 중심이 되고 출애굽–가나안 정착이 주조를 이루는 민족 서사시. 출애굽의 해방 정신과 그 속의 평등 사회를 신앙으로 계승했다 — 아모스·호세아·미가·예레미야.
주전 8세기 남왕국의 이사야(1–39장)는 다윗–예루살렘 이야기를 근본으로 삼는다. 초점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다(사 4:1, 3–5).
포로기 전까지 따로 전승되던 모세–출애굽 전승(북이스라엘)과 다윗–예루살렘 전승(남 유다)이 식민지 살이의 설움 속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주전 6세기 중반, 다윗·왕조·시온 신학은 철저히 모세 신앙의 정신에서 재해석된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예언서가 제2이사야다.
예언자들이 되살리려 한 옛 신앙 전통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던 시내산의 율법 정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 시대·상황에 그 스스로를 적용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기에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누구나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다.